라부아지에

  1763년 [ 21세 ]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는 대도시에 가로등을 설치하는 방안에 관해서 공모를 하였다. 라부아지에는 여기에 참여하였고 그의 제안은 뛰어남을 인정받아 1766년 08월 09일 아카데미로부터 메달을 받았다. 1765년 02월 27일 라부아지에는 석고를 분석하여 그 논문을 과학 아카데미에 제출하였다. 게타르의 제안으로 작성된 이 논문은 지질학·광물학·화학 등을 모두 다루고 있었다. 1766년 03월 19일 그는 석고에 관한 두 번째 논문을 제출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될 필요성을 느껴 4월 아카데미의 실험 물리 분야에 회원 가입을 요청하였다. 아카데미는 라부아지에의 신청을 거절하였으며, 라부아지에는 요청이 거절된 바로 다음 날 화학 분야에 회원 가입을 요청하였다. 1767년 06월 14일 라부아지에는 게타르를 따라 보주 산맥을 탐사하러 떠났고, 10월 19일에 파리로 다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라부아지에는 각 지역의 광천수를 분석하여 그것이 토양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1768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자리에 공석이 생기자 라부아지에는 새로운 회원 후보자가 되었고, 05월 18일의 투표에서 가장 많은 표를 획득함에 따라 06월 01일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 [ 26세 ] 
  
  당시에 물을 계속해 증류하면 흙이 된다는 가설이 여러 과학자 사이에서 만연하였다. 그러나 라부아지에는 이러한 주장에 의심하였으며, 1770년 04월 10일에 발표한 논문에서 물이 흙으로 변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그는 이 실험에서 물질은 생성되거나 파괴되지 않고 단지 형태가 바뀔 뿐이라는, 질량 보존의 법칙을 철저히 따랐다.
  1771년 12월 04일 자크 폴즈( :: 세금 징수 조합의 상관으로 세금 징수원, 변호사, 그리고 프랑스 동인도 회사의 감독이었고 나중웨 루이 16세에 의해 프랑스 재정총감에 임명됨 )의 외동딸인 마리안 피에레테 폴즈와 결혼하였다. 이후 마리안은 이후 실험기구 묘사, 결과 기록, 영어 논문 번역 등을 하면서 라부아지에를 도왔다. 라부아지에는 많은 돈을 벌어 최고의 과학 장비를 사들일 수 있었다. 
  
  1772년 11월 01일에 라부아지에는 황과 인을 연소할 경우 공기를 흡수하여 질량이 증가하고, 금속회(금속 산화물)를 가열할 경우 공기를 잃으며 금속이 생성되고 질량이 감소한다는 내용의 논문을 아카데미에 제출하였다. 그는 공기 중 어느 성분이 이러한 현상과 관련된 것인지 알지 못하였다. 그는 이 실험의 결과를 《물리와 화학 소론》(Opuscules Physiques et chimiques)이라는 책으로 1774년에 출판하였다.1774년 영국의 조지프 프리스틀리가 산소를 발견하였고, 그해 10월 라부아지에는 파리를 방문한 프리스틀리를 통해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1775년 3월 프리스틀리는 산소의 발견을 공식적으로 발표. 한편 스웨덴의 칼 빌헬름 셸레 역시 1772년경 산소를 발견하여 그에 관한 내용을 라부아지에에게 1774년 09월 30일 편지로 보냈으나, 정작 라부아지에는 10월 15일 셸레의 편지를 받고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라부아지에는 프리스틀리가 발견한 기체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연소와 관련된 공기 일부와 대응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공기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서 추가적인 실험을 진행하였다.1775년 03월 라부아지에는 숯가루를 연소한 후 발생하는 기체를 물에 녹이면 탄산수가 생성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추가적인 실험을 통해서 이때 발생하는 기체가 이산화 탄소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라부아지에는 이러한 자신의 발견과 이전의 연소에 관한 연구를 종합하여, '생명의 공기'는 principe oxygine과 연소 현상에 관계되는 화소(火素)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생각에 기초하여 그는 1777년 11월 12일에 제출된 논문을 통해서 플로지스톤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연소를 ‘물체가 불에 타기 때문에 물체에는 플로지스톤이 존재하고, 물체가 타는 이유는 플로지스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는 플로지스톤설은 순환논법에 불과하고, 결국 플로지스톤설은 가설일 뿐이라고 비판하였다.
  
  라부아지에는 자신의 이론을 널리 알릴 교과서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1789년 01월 17일 《화학 원론》을 출판하였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부에서 그는 이전까지의 그의 연구를 정리하여 공기와 물의 조성, 연소와 산에서의 산소의 역할, 열과 호흡, 발효에 관한 이론 등을 저술하였다. 제2부에서는 산, 염기 등의 목록과 화합물, 화학 원소 등의 목록을 저술하였는데, 이들은 최초의 근대적인 화학 물질 목록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제3부에서는 실험에 관해서 저술하였다.
  
  1794년 05월 02일, 뒤팽이 제안한 전직 세금 징수원에 관한 처분안이 혁명법원으로 넘겨졌으며, 라부아지에는 사형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05월 05일 뒤팽의 전직 세금 징수원에 관한 보고서가 제출되었으며, 결국 05월 08일 기소된 32명 중 라부아지에를 포함한 28명이 유죄로 결론지어져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날 저녁 라부아지에는 자크 폴즈와 함께 혁명 광장(현 콩코르드 광장)의 단두대에서 참수되었다. 그의 시신은 장례식도 치르지 못한 채 공동묘지에 버려졌다. 1789년부터 1794년까지의 혁명정국에서 라부아지에는 도량형 통일안 제작을 의뢰한다거나 질량의 단위를 정하는 일을 진행하는 등 공직에서 활동했고 91년 12월에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재무 담당관이 되었고 리세 기술학교(Lycèe des Arts)의 경영에 참여하기도 했다.1790년 말, 라부아지에는 모든 정치적인 활동을 중지하고, 의회의 재정 고문의 자리만 유지하기로 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는 과학 연구를 재개하였다. 그는 호흡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여 호흡은 혈액을 식히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그 대신 호흡은 탄소와 수소를 연소시키는 과정이라고 주장하였다.또한, 그는 발한 작용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기도 하여, 열이 호흡때문에 발생하면 발생한 열을 땀의 증발을 통해서 방출한다고 주장하였고, 상당한 양의 수분이 호흡을 통해서도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한, 발한 과정에서 잃어버리는 물의 양 측정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라부아지에는 양분에 관해서도 관심을 가졌고, 1792년에는 동물의 유기 합성에 양분이 사용되는 과정에 관한 연구에 상금을 걸기도 하였다. 라부아지에의 사형 직후, 집행관이 라부아지에의 집과 연구실의 모든 책, 기자재 등의 목록을 작성해 갔고, 5월 30일 이를 몰수하였다. 
  
  거의 모든 라부아지에의 재산이 몰수된 상황에서 라부아지에의 부인인 마리안 라부아지에 역시 체포될 위기에 처했으나, 그녀는 피신하지 않고 집을 지켰다. 결국 6월 14일 그녀는 체포되어 감옥으로 압송되었으나 남편과는 달리 사형은 면하고 8월 17일에 풀려났다.12월 10일, 전직 세금 징수원의 사형 이후 매우 어렵게 살아가는 유족의 이야기가 담긴 Le cri dis familles가 출판되자 사형을 주도한 앙투안 뒤팽은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다. 1795년 마리안 라부아지에를 포함한 몇몇 유족이 뒤팽에게 전직 세무 징수원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하였으며, 그 결과 1796년 04월 그녀는 공식적으로 라부아지에의 유품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1805년 마리안은 럼포드 백작 벤저민 톰프슨과 재혼하였고,1836년 2월 10일 사망하였다. 라부아지에의 조수였던 엘테일은 프랑스혁명을 피해 미국에 이민하여 듀폰사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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